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모토 겐지 (문단 편집) === 가택연금과 탈북 === 그러던 중, 귀국 5개월 만인 [[1998년]] 11월, 그는 식재료 공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게 된다. 후지모토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 일본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였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의 편의를 봐주었으며, 북한에 돌아가는 대신에 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외국에 나올 때마다 자신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 경시청 형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도청을 피하기 위해 간단하게 전화를 끊었으나 북한 당국은 그의 객실 전화기에 미리 도청장치를 숨겨둔 상황이었고 모든 대화 내역이 낱낱이 당에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를 김정일에게 보고한 것은 국제부 부부장, 서기실 부부장 [[길재경]][[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609100014|이었다.]] 귀국 후 그는 일본 경시청 스파이 혐의로 추궁을 당하게 되었는데, 형사에게 "맡긴 것을 잘 부탁한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 부분을 집중추궁당하게 된다.[* 정확히 뭘 맡긴 건지는 후지모토가 책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후지모토는 결국 일본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찢어버린 북한 그린 여권을 맡겨둔 것이라고 둘러대어 스파이 혐의는 벗을 수 있었지만 그의 성분에 대한 의심이 가중되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평양의 고급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같이 머무를 수 있게 되었지만, 경시청에 체포되었을때 형사들이 그가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읽게 한 [[탈북자]] 수기들에 적힌 고문이 생각나서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고. 후지모토는 곧 로열패밀리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자신을 불러 요리를 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전전긍긍했지만 1998년은 물론, 1999년 한해가 다 가도록 김정일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아파트에서 술만 퍼마시면서 기껏해야 일본 스모 방송을 라디오로 듣는 것이 소일의 전부일 정도로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 아내 엄정녀도 처음에는 태연한척 하려 했으나 결국 불안이 폭발해서 울면서 여길 떠나자고 했을 정도였다고. 1999년 12월 31일이 되자, 1990년에 김정일이 2000년을 다 같이 맞이하자고 준 반지를 끼고 김정일이 부르길 기다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다가 2000년 4월이 되어서야 김창선을 통해서 다시 부름을 받게 된다. 김정일을 다시 만나서 울면서 용서를 빈 다음에 다시 그의 요리사로 일했으나 이 경험으로 인해 후지모토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북한 정권에 학을 떼게 된다.[* 후지모토가 없는 동안 마카오 사업가가 김정일을 위해 출장 요리사를 불렀으나 후지모토보다 실력이 못한지 김정일이 만족하지 못했다고.] 이후 고용희의 배려로 다시 일본으로 출장도 갈 수 있게 되면서 김정일과 같이 찍은 사진을 미리 복사하여 일본에 옮겨놓았으나 자신의 출국을 주선해준 고용희의 체면을 생각해 그땐 탈북하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굵직한 이벤트가 있어 2000년 [[정주영]] 회장의 방북과 [[제1차 남북정상회담]] 등을 겪게 되는데 일본인인 후지모토의 존재가 노출될까봐 원산의 초대소에 숨어야 했다. 정주영의 귀국 후에는 김정일과 함께 정주영이 선물한 막걸리를 마셨다고. 이때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그가 요리를 준비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으나 후지모토는 자신은 오로지 김정일을 위해서만 요리를 만들었다고 부인했다. 다시 해를 넘겨 2001년, 탈북하기로 완전히 마음먹은 후지모토는 김정일에게 홋카이도식 성게알 요리를 해주겠다고 그를 구슬러[* 지난번 일본 방북 때 계획적으로 성게알 맛집 탐방 프로를 비디오로 녹화해서 챙겨둔 상황이었다.] 일본 출장 허락을 받게 된다. 탈북 직전 승마를 하다가 낙마하는 통에 크게 다쳐서 한동안 요양을 해야 했지만 더 있다간 다신 북한을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 여겨[* 불과 2달 후 [[김정남(북한)|김정남]]의 추방 사건이 벌어졌고, 2002년 1차 북일 정상회담과 [[납북 일본인]] 사태가 벌어져 실제로 경계가 더 삼엄해졌다.] 다소 무리하여 2001년 4월, 탈북을 하게 된다. 김정일이 후지모토가 떠나기 전날 "사요나라"라고 인사했는데, 후지모토는 과거에 김정일이 사요나라라고 하면 그건 다신 안볼 때 하는 인사라고 웃으면서 가르쳐줬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목례만 간단히 했다고 한다. 또한 탈북 직전 [[김정은]]을 만나 포옹하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탈북 직전에는 김정은이 수령이 되어 자신에게 같이 공화국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꿈도 꿨다고. 근 20년 후에 사실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의 탈북으로 인해 평양에 남아있던 엄정녀와 그의 자녀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힘든 생활을 했다고 전해졌는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후지모토는 이러한 얘기에 당혹해하면서 사생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고 답변을 거부했다.] 최근 기사에서는 평양에 살고 있고 가족과도 만났다고 전해진다. 아마 후지모토의 재방북을 준비하느라 석방해 준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2003년, <김정일의 요리사>를 집필한 것을 시작으로 약 10년간 일본에서 칩거하며 북한 김씨 일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까발렸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퍼트렸으니 혹시나 북한에서 암살자 등을 보내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았으며 이 때문에 TV에 출연할 때마다 북한의 [[살인 청부업자]]로부터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큰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시체매]] 조종수처럼 변장해서 얼굴을 감췄다.--근데 이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가명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여튼 북에 있을때 호의호식한 것도 사실이라서 <김정일의 요리사>를 맨 처음 내놓을 때 책 후기로 김정일에게 보내는 사죄문을 써서 13년이나 김정일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주체사상을 공유하지 않는 일본인이 김정일의 측근이 되는 것은 무리였다면서 상당히 저자세로 사과를 하고 있다. 이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의 사치 행각을 지적하면서 그를 폭군으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유도성 질문에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 정도는 대단한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 김정일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것은 거부했으며, [[기쁨조]] 문제에 대해서도 김정일을 모시는 무용수들이 간부들 상대로 성접대를 강요당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며 그럴 리도 없다고 부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